엄밀하게 구분해서 사용하는 사람이 드물긴 하지만 회사에는 직위, 직급, 직책, 직함이 있습니다. 네이버 국어 사전에서 각 단어의 뜻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직위 (職位)
- 직무에 따라 규정되는 사회적ㆍ행정적 위치.
- <법률>직무와 직책에 의하여 규정되는 공무원의 위계.
- 직급 (職級)
직무의 등급. 일의 종류나 난이도, 책임도 따위가 상당히 비슷한 직위를 한데 묶은 최하위의 구분이다. 동일한 직급에 속하는 직위에 대하여서는 임용 자격, 시험, 보수 따위의 인사 행정에 동일한 취급을 할 수 있다. [비슷한 말] 직계3(職階).
- 직책 (職責)
직무상의 책임.
- 직함 (職銜)
벼슬이나 직책, 직무 따위의 이름.
우선 직위는 서열이나 순위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사원, 대리, 과장, 차장, 부장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승진은 직위의 상승을 말합니다. 비슷한 말로 직급이 있는데, 직급은 직위를 좀 더 세부적으로 분류했다고 보면 됩니다. 일반 기업에서는 직위와 직급을 구분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드물지만, 공무원 조직에서 말하는 “9급 5호봉”, “7급 4호봉” 등의 용어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직위나 직급과 구분하여 직무상의 책임을 뜻하는 말로 직책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팀장은 직위나 직급이 아닌 직책입니다. 조직의 규모와 성격에 따라 차장이 팀장을 할 수도 있고, 부장이 팀장을 할 수도 있으므로 직위, 직급과 직책은 구분됩니다. 하지만 회사에 따라 팀장을 직책이 아닌 직위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직함은 호칭을 말합니다. 김개똥 부장을 호칭할 때 “김개똥 부장님”이라고 부른다면 부장은 직위인 동시에 직함이 됩니다. 혹은 김개똥 부장을 호칭할 때 “김개똥 팀장님”이라고 부른다면 팀장은 직책인 동시에 직함이 됩니다. 외국계 기업이나 스타트업에서는 직위 대신 이름 뒤에 “님”만 붙이거나 영어 이름을 부르기도 하는데, 이것도 일종의 직함이라고 볼 수 있고, 직함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에는 직함을 존중의 의미를 담은 높임말로 쓰기 때문에 수평적인 의사소통을 가로 막는 요인이라는 비판이 많습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직함을 폐지하거나 하나로 통일하는 회사들도 들고 있는데, 특히 협업과 의사 소통을 중시하는 소프트웨어 개발 회사에서는 직위를 직함으로 사용하지 않는 문화를 만들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국내 대기업의 예로, SK플래닛은 모든 직함을 “매니저”로 통일하였고, 팀장 직책에 대해서만 팀장이라는 직함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직함을 매니저로 통일하였다고 해서 직위나 직급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인사 평가에 사용하기 위한 직위/직급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다만, 직위를 직함으로 사용하지 않게 되면 다른 사람의 직위를 알기가 어려워지는 효과가 있습니다. 이 부분은 회사의 문화에 따라 큰 차이가 있습니다. 모두가 다른 사람의 직위를 공공연하게 알지만 단순히 호칭만 하지 않을 수도 있고, 연봉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직위 자체를 알기 어렵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배경 설명은 마쳤고, 이제 핵심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직함의 폐지(직위를 직함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가 소프트웨어 개발 조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까요?
YES라고 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주로 외국 기업과 비교합니다. 구글, 페이스북, 마이크로소프트 등 중요 소프트웨어 기업들 중에 우리처럼 직위를 직함을 사용하는 곳이 없으므로, 소프트웨어를 잘 만들기 위해서는 직함을 폐지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미국을 위시한 서양권 국가는 직함 문화 자체가 없고, 소프트웨어 기업뿐만 아니라 모든 기업이 마찬가지이므로 이렇게 단순 비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YES라고 답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프트웨어 개발을 잘하기 위해서는 수평적인 조직 문화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문제는 단순히 직함만 폐지한다고 해서 수평적인 조직 문화가 거저 생기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직함을 폐지하면 수평적인 의사소통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과관계를 뒤집은 것입니다. 직함으로 인해 수직적인 조직 문화가 생긴 것이 아니라, 우리사회를 지배하는 수직적인 조직 문화를 반영한 수많은 결과 중에 하나가 직함이기 때문입니다.
소프트웨어 개발팀만 놓고 보면 사원과 대리, 대리와 과장 사이에 위계 질서가 생길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사실 프로젝트를 진행함에 있어 직위 자체가 주는 고유의 권한이라는 게 없습니다. 권한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위에서 내려오는 권한과 스스로 획득하는 권한입니다. 팀의 경우 위에서 내려오는 권한은 전적으로 팀장이 가지고 있고, 필요에 따라 팀원들에게 위임됩니다. 스스로 획득하는 권한은 실력 혹은 전문성입니다. 내가 특정 분야의 전문가이면 팀장이라고 해도 그 분야의 의사 결정에 있어서는 내 의견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대리나 과장이기 때문에 저절로 생기는 권한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이렇게 생각하면 직함이 있든 없든 수평적인 의사소통이 안 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아무도 직위가 주는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런 권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바로 옆에 있는 과장을 과장이라고 부르든 사장이라고 부르든 재벌 총수라고 부르든 달라지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반대로 모두가 직위 자체가 주는 권위가 있다고 생각하면 직위를 직함으로 불러주는 행위가 권위를 인정하는 표시가 됩니다.
이전에 일했던 회사에서 재미있는 사례가 있습니다. 당시에 개발팀의 직함을 SE(소프트웨어 엔지니어), 리드(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구분하고 있었습니다. 일반 회사로 치면 사원, 대리는 SE, 과장, 차장을 리드라고 압축해서 부른다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직함이 직위를 반영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작은 기업이다보니 인사 시스템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아서 인사 평가나 연봉은 직함과 상관 없이 별도로 진행하였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해, SE에서 리드로 직함이 바뀐다고 해도 실질적으로 권한이 생기거나 연봉이 오르지 않는 시스템이었습니다. 리드가 되는 게 엄밀히 말해 승진이 아니었던 겁니다.
하지만 직원들이 이 시스템을 이해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습니다. 단순히 직함만 바뀌는 것뿐인데도, 리드를 승진으로 생각하고 직함 자체가 주는 어떤 권위나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 리드 직함을 단순 말장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리드로 직함이 바뀌고 나면 승진 축하 파티를 여는 사람들도 있었고, 말장난 같은 리드라는 직함을 부끄러워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두 부류의 사람들은 일하는 방식도 완전히 다릅니다. 리드라는 직함이 권위를 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의사 결정을 할 때 “내가 리드니깐 내 말을 따라”라고 이야기합니다. 같은 생각을 가졌지만 리드가 되지 못한 SE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 자신의 권한을 넘는다고 생각하면 “제가 리드도 아닌데 그렇게 해도 되나요?”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리드가 말장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행동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느낍니다. 권한은 실제로 권한이 있는 사람에게 위임 받았거나, 실력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혼란을 없애기 위해 제가 맡은 팀들에서 한해서만 실험적으로 직함을 폐지하였습니다. 리드라는 직함을 없애고 이름 뒤에 님만 붙이는 걸로 호칭을 통일하였습니다. 하지만 직함을 폐지했다고 당초 두 부류로 나뉘었던 사람들의 성향이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수직적인 조직 문화에 익숙한 사람은 수평적인 문화가 불편합니다. 자신의 직위에서 나오는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불만도 생깁니다.
정리하면, 조직과 사람은 그대로인데 직함만 바꿔서 어떤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제대로 소프트웨어를 만들 수 있는 수평적인 조직을 만들고 싶다면 그에 맞는 사람만 뽑아서 팀을 따로 구성해야 합니다. 하지만 수직적인 조직 문화가 팽배한 우리 사회에 이런 성향의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어릴 때부터 학교와 군대, 사회 생활을 통해 철저하게 학습된 사고 방식이 하루 아침에 바뀔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유능한 조직이 되려면 철저하게 이런 수직적 조직 문화를 잘 활용하는 것이 답일 수도 있습니다. 대기업이나 악명 높은 일부 게임 개발사들처럼 말입니다. (물론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직함은 우리사회에 뿌리 깊은 수직적 조직 문화의 그림자 같은 것입니다. 그림자를 지운다고 본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직함을 폐지한다고 저절로 수평적인 조직이 되는 것도 아니고, 직함이 존재한다고 해서 반드시 수직적인 조직인 것도 아닙니다. 누군가의 권위는 그 사람한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에서 나오는데 그 생각을 바꾸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가 싫어하는 권위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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